나도 그런 적 있었어. 하루 종일 스토리보드 툴만 켜놓고 피그마나 액셔로 도형만 이리저리 옮기다 퇴근하는 길에, 문득 엄청난 허무함이 밀려오더라고. "나는 서비스를 기획하는 사람인가, 아니면 그냥 화면을 그리는 공장의 부품인가?" 하는 생각에 밤새 잠을 못 이루기도 했지.
"이러려고 기획자 됐나" 싶던 막막했던 시절
연차가 쌓이기 전에는 나도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어. 현업 부서나 위에서 던져주는 요구사항을 그대로 받아 적고, 그걸 어떻게든 화면으로 구현해 내는 게 내 업무의 전부 같았거든. 개발자나 디자이너가 "이 화면 왜 이렇게 그렸어요?"라고 물어볼 때,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적도 많아. 그때는 내가 기획자가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요구를 시각화해 주는 '대필가'처럼 느껴져서 참 많이 괴로웠어.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갉아먹었지.
화면 뒤에 숨겨진 '왜(Why)'를 찾기 시작했을 때
이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, 화면을 그리기 전에 '왜 이 화면이 필요한가'에 집착하는 것이었어. 단순히 "이 버튼을 여기에 넣어주세요"라는 요청을 받으면, 바로 피그마를 켜는 대신 질문을 던졌지.
- "이 버튼을 통해 유저가 해결하려는 진짜 문제는 뭘까?"
- "이 기능을 배포했을 때 우리가 얻는 비즈니스 임팩트는 무엇인가?" 데이터를 뜯어보고 유저 인터뷰를 하면서, 화면 뒤에 숨겨진 진짜 문제를 정의하기 시작했어. 그러니까 신기하게도 내가 그리는 화면의 선 하나, 버튼 하나에 확신과 무게가 실리더라고. 더 이상 요구사항을 받아 적는 게 아니라,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을 제안하는 사람으로 포지셔닝이 된 거지.
7년 차가 되어 보니 보이는 것들
지금 7년 차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면서 깨달은 건, 화면(Wireframe)은 기획자의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'수단'일 뿐이라는 사실이야. 우리의 진짜 가치는 화면을 예쁘게 그리는 데 있는 게 아니라, 복잡한 비즈니스 로직을 단순화하고, 팀원들을 설득해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조율의 과정에 있더라고. 화면을 그리는 일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. 네가 고민해서 배치한 그 버튼 하나가 유저의 불편함을 해결하는 시작점이니까.
💬 예진의 한마디 스토리보드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야. 그건 단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을 세상에 꺼내놓는 가장 첫 번째 도구일 뿐이거든. 네 가치를 화면 크기에 가두지 마. 지금 겪고 있는 그 고민은 네가 더 좋은 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건강한 욕심에서 나온 거야.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고, 네가 해결하려는 문제에 집중해 봐. 너는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고, 멋지게 성장하는 중이니까 힘내자!